여성 청소년에게 필수인 HPV 백신, 중학생 아들도 맞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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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스픽] 〈120〉 남아 HPV 백신

아플 땐 누구나 막막합니다. 어느 병원, 어느 진료과를 찾아가야 하는지, 치료 기간은 얼마나 걸리는지, 어떤 치료법이 좋은지 등을 끊임없이 고민합니다. 아파서 병원에 갔을 뿐인데 이런저런 치료법을 소개하며 당장 치료가 필요하다는 말에 당황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주변 지인의 말을 들어도 결정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럴 때 알아두면 쓸모 있는 의학 상식과 각 분야 전문 의료진의 진심 어린 조언을 소개합니다. <편집자주>

Q. 고등학생 딸과 중학생 아들을 둔 엄마입니다. 올해 중학교를 입학한 아들의 HPV 백신 접종에 대해 고민입니다. 첫째 딸은 학교에서 가정통신문이 나오고 국가필수예방접종 사업으로 HPV 백신을 무료로 접종했습니다. 그런데 둘째인 아들은 정부 지원이 없습니다. TV·신문에서도 HPV 백신은 남자도 접종이 필요하다고 해서 관심 있게 찾아봤는데 개인적으로 접종하려니 30~40만원은 들어 경제적 부담이 느껴집니다. 아들도 청소년기인 지금 HPV 백신을 접종해야 하는지, 비용 부담을 감안하고도 접종해야 하는 의학적 이유가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가톨릭대 의정부성모병원 비뇨의학과 배상락 교수의 조언

HPV 백신은 초기 자궁경부암 백신으로 불리면서 여성에게만 필수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남성 역시 의학적으로 HPV 백신 접종이 필요합니다. 성 접촉을 통해 확산하는 HPV의 공격은 성별을 가리지 않습니다. 남녀를 불문하고 누구나 HPV에 감염될 수 있습니다. 성인의 80%는 일생 동안 한 번은 HPV 감염을 경험한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물론 HPV에 감염되더라도 자연적으로 소멸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HPV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암으로 진행할 수 있습니다. 남성이 HPV에 감염되면 구인두암, 두경부암, 항문암, 음경암, 생식기 사마귀를 앓을 수 있습니다. 국제인유두종협회(IPVS)에 따르면 모든 종류의 암 중 5%가 HPV 감염이 원인으로 분석됩니다. HPV 감염으로 남성의 정자 운동성이 떨어지는 등 생식력이 약화한다는 연구결과도 있습니다. 

HPV 감염으로 인한 질병은 HPV 백신 접종으로 예방할 수 있습니다. 성별에 상관 없이 HPV 백신 접종을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관련 연구에 따르면 HPV 백신은 여성에게 치명적인 자궁경부암뿐만 아니라 질암·외음부암, 남성의 음경암, 남녀 모두에서 생식기 사마귀· 항문암·두경부암을 예방합니다. HPV 백신 접종의 질환 예방 효과와 안전성은 10년 이상의 추적 연구를 통해 입증됐습니다. 우리나라 정부도 HPV 백신 접종 효과를 인정해 2016년부터 12세 여성 청소년을 국가필수예방접종(NIP)로 지정해 지원하고 있습니다. 

최근 남성에서 HPV 백신 접종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국가필수예방접종에 7~18세 남녀 청소년에게 HPV 백신 접종을 권고합니다. 유럽암기구(The European Cancer Organisation)에서도 유럽의 모든 국가를 대상으로 남녀 모두 HPV 백신 접종을 강조합니다. 특히 2030년까지 90%의 남녀 청소년의 HPV 백신 접근성을 확보할 계획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국내에서도 변화하는 글로벌 보건 트렌드에 맞춰 남성 청소년의 NIP 대상 확대를 논의하는 상황입니다. 이미 전 세계 66개 국가에서 남성의 HPV 백신 접종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특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에서는 28개국이 남성 청소년을 포함한 국가 예방 정책을 진행 중이고, 이 국가들의 70% 이상은 최신의 9가 백신으로 남녀 모두에게 지원하고 있습니다. HPV 예방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는 호주는 남성 HPV 백신 접종률 78%, 영국은 남녀 평균 60~70%에 이릅니다. HPV 백신을 접종한 남성이 접종하지 않은 남성보다 많아지는 추세입니다. 


남성 HPV 백신 접종을 강조하는 이유는 HPV 감염에 의한 남성암 질병 부담이 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 CDC에 따르면 2012~2016년 HPV 7가지 유형의 구인두암 발생 모델에서 여성보다 남성에서 5배 더 흔하게 구인두암이 발생하는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특히 미국의 2015~2019년 데이터 분석을 통해 남성의 HPV 관련 구인두암 발생률이 여성의 자궁경부암 발생률보다 높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비뇨의학과 영역에서는 암처럼 치명적이지는 않지만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성매개 감염병인 생식귀 사마귀 예방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비교적 흔한데다 재발이 잦고 사회적 낙인을 감안하면 예방적 대처가 중요합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HPV 감염 시 생식귀 사마귀 재발률은 44%나 됩니다. 참고로 우리나라 질병관리청에 성매개 감염병으로 신고되는 생식기 사마귀 발생 건수는 2002년 326건이었으나 2023년 3100건으로 9.5배 늘었습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빅데이터 분석을 통한 연구에서 남성의 생식기 사마귀 유병률은 2017년 10만 명당 132명에서 2018년 10만 명당 443명으로 3배 이상 증가한 것으로 보고됐습니다. 

HPV 백신의 효과는 성 경험이 있어도, HPV에 감염된 적이 있어도 유효합니다. 다만 백신의 접종 효과를 최대한 높이려면 HPV에 한 번도 노출된 적이 없는 성 경험 전에 접종을 완료하는 것이 좋습니다. 2021년 청소년건강행태조사에 따르면 첫 성경험 나이는 14.1세입니다. 특히 만 14세 이하 청소년은 HPV 백신 2회 접종만으로도 효과가 있습니다. 접종 시기를 미루기보다 가급적 청소년기에 접종을 완료하길 권합니다. 

참고로 HPV 감염은 성 접촉을 시작한 다음부터 늘어납니다. 문제는 HPV 감염에 취약한 20~30대입니다. 여성이라도 NIP 시행 이전인 2003년 이전 출생자거나 남성은 HPV 백신을 접종하지 않은 상태일 수 있습니다. 당장의 접종비가 부담일 수 있지만 자신의 건강을 위해 HPV 백신 접종을 고려하길 바랍니다. 국내 접종 가능한 HPV 백신은 여성은 만 9~45세, 남성은 만 9~26세까지 입니다. 

HPV 감염은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에서도 나타날 수 있고, 반복 감염으로 암으로 진행할 수 있습니다. 몇 해 전 남자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진행한 성 건강 교육에서 성에 대한 고민이 많아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HPV 백신 접종이 청소년기 성에 대한 건전한 고민을 시작하는 첫걸음이 될 수 있길 바랍니다.

정리= 권선미 기자 kwon.sunmi@joongang.co.kr

※ 진료받을 때 묻지 못했던 궁금한 점이 있으면 메일(kwon.sunmi@joongang.co.kr)로 보내주세요. 주제로 채택해 '닥터스 픽'에서 다루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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