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발 많은 고령층 만성 림프구성 백혈병, 첫 치료가 중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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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스 픽]〈49〉만성림프구성백혈병 치료

아플 땐 누구나 막막합니다. 어느 병원, 어느 진료과를 찾아가야 하는지, 치료 기간은 얼마나 걸리는지, 어떤 치료법이 좋은지 등을 끊임없이 고민합니다. 아파서 병원에 갔을 뿐인데 이런저런 치료법을 소개하며 당장 치료가 필요하다는 말에 당황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주변 지인의 말을 들어도 결정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럴 때 알아두면 쓸모있는 의학 상식과 각 분야 전문 의료진의 진심어린 조언을 소개합니다. <편집자주>

Q. 희귀 혈액암 진단을 받은 60대 남성입니다. 지난해 6월 건강검진에서 백혈구 수치가 높아 정밀검진했는데, 이 나이에 만성 림프구성 백혈병이라고 합니다. 진단 당시에는 특별한 증상이 없어 치료를 곧바로 시작하지 않고 경과를 관찰했습니다. 그런데 초겨울부터 몸이 약해졌나 싶더니 피로감이 부쩍 심해졌습니다. 몇 주 전에는 쇄골 부근에 멍울이 만져지는 듯한 느낌도 듭니다. 증상이 악화하면 독한 항암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데 견딜 수 있을지 걱정됩니다. 이 상태로 지내면 안 될까요.

서울대병원 혈액종양내과 변자민 교수의 조언 

전신 쇠약감 등으로 몸 상태가 악화됐다는 생각에 걱정이 클 것으로 보입니다. 현 상황에서는 담당 전문의와 몸 상태를 점검하고 치료 시작 여부 등을 결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일반적으로 만성 림프구성 백혈병(Chronic Lymphocytic Leukemia·CLL)이 진행하면 정상적인 골수 기능이 약해지면서 어지럼증, 두통, 피로감, 빈혈, 숨 참 같은 증상을 보입니다. 다만 쇄골 부근에 멍울이 만져진다는 점이 염려스럽습니다. 림프계 세포 이상으로 목 옆이나 쇄골 부근 림프절까지 침범하면서 멍울이 만져지는 것 추측됩니다. 정상적인 백혈구가 줄면서 면역력이 떨어져 열이 오르고 폐렴, 요로 감염 등 감염증을 겪으면서 전신 상태가 나빠집니다.

만성 림프구성 백혈병은 백혈구의 일종인 림프구가 성장하면서 암으로 변해 정상적인 혈액세포의 생산을 방해하는 혈액암입니다. 다행히 다른 백혈병에 비해 비교적 양호한 예후를 보입니다. 또 만성이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질병 진행 속도가 빠르지 않다는 특징을 보입니다. 질문을 주신 분처럼 진단 즉시 치료를 시작하지 않고 경과를 관찰하는 경우가 절반 이상에 달합니다. 대부분 경과를 관찰하다가 증상이 발생하거나 병이 진행하는 소견을 보이면 치료를 시작합니다.

그래서 만성 림프구성 백혈병으로 진단 받으면 정기적이고 적극적인 모니터링으로 질병 진행 시그널을 파악해 치료 시기를 놓치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환자 스스로도 신체 컨디션 변화를 살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만성 림프구성 백혈병이 진행하면 골수 기능이 점차 감소하면서 어지럼증, 두통, 잦은 피로감, 빈혈, 숨 참 같은 증상이 나타납니다. 또 쉽게 멍이 들거나 피가 잘 멈추지 않는 혈소판 감소 증상도 보입니다. 림프계 세포 이상으로 정상적인 백혈구가 줄면서 면역력이 떨어져 폐렴, 요로감염 같은 감염증을 겪기도 합니다. 림프절이 커지는지도 점검해야 합니다. 림프절 침범은 주로 목 옆으로 경구림프절이나 쇄골상부 림프절에 나타납니다. 특히 질환과 관련된 증상인 발열, 오한, 발한, 체중 감소, 심한 피로감이 있거나 림프구 숫자가 두 배가 될 때까지 걸린 시간이 6개월 이하라면 치료를 시작해야 합니다. 

치료 전략도 중요합니다. 만성 림프구성 백혈병은 재발이 잦은 질환입니다. 항암 치료로 암세포가 사라지는 관해 상태였다가 다시 증식할 수 있습니다. 실제 1차 치료 후 절반 정도는 3년 이내 재발을 경험합니다. 첫 치료를 시작하는 시점부터 치료법의 재발율은 얼마나 낮은지, 치료 효과는 얼마나 지속되는지, 환자가 잘 견딜 수 있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장기간 부작용이 적은 치료법을 선택하는 것이 좋습니다. 

현재 국내 만성 림프구성 백혈병의 1차 치료 대부분은 보험급여가 적용되는 FCR요법(플루다라빈·싸이클로포스파이드·리툭시맙)으로 진행됩니다. FCR요법은 건강하고 불량한 예후인자가 없는 만성 림프구성 백혈병 환자에게 효과적입니다. 다만 혈구 감소 부작용 위험이 높아 65세 이상 고령이거나 동반 질환이 있으면 권장하지 않습니다. 간혹 오비누투주맙·클로람부실을 병용한 GC요법을 쓰기도 하는데, 국제적 표준 치료법은 아닙니다. 또 GC요법에 쓰이는 클로람부실이란 약은 국내에서 구하기 어려워 안정적인 약 공급에 문제가 있습니다. 또 내복성도 좋은 편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최근의 만성 림프구성 백혈병 치료는 클로람부실·플루다라빈 같은 세포독성 항암제를 쓰지 않는 '케모 프리(Chemo- Free)'로 바뀌고 있습니다. 핵심은 과도한 B세포 증식을 억제하는 것입니다. B세포가 적정 수준 이상으로 늘면 암 활성이 높은 악성 B세포로 바뀌는 것에 착안한 치료법입니다. B세포의 신호전달 경로를 차단하는 기전을 가진 브로톤 티로신 키나제(Bruton’s tyrosine kinase, BTK) 억제제 계열의 약도 있습니다. 임브루비카(성분명 이브루티닙)가 대표적입니다. 

암 치료 분야에서 전 세계적으로 가장 권위 있는 암 치료 지침서인 미국종합암네트워크(National Comprehensive Cancer Network, NCCN) 가이드라인에서는 불량한 예후인자, 고령, 동반 질환 여부에 상관없이 만성 림프구성 백혈병의 1차 치료에 BTK 억제제를 최우선(category1)으로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치료 받은 적이 없는 만성 림프구성 백혈병 환자를 대상으로 한 임브루비카의 전체 반응률은 무려 92%에 달합니다. 이상 반응도 대부분 경미하거나 조절 가능한 수준입니다. 투약 편의성도 높습니다. 캡슐 형태의 먹는 경구약이라 하루 1번만 복용하면 입원하지 않고 외래에서 항암 치료가 가능합니다. 보험 급여가 적용되는 FCR 요법은 4주마다 최소 4일 정도 입원해 항암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현재 국내에서는 만성 림프구성 백혈병 1차 치료로 임브루비카를 투약하면 건강보험 급여 혜택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치료 이력이 적을수록 무진행 생존 기간이 연장되는 경향을 보이는데 금전적인 문제로 임상 현장에서 1차 치료에 임브루비카 등 BTK 억제제 계열의 약을 쓰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의료계에서도 장기 치료 지속성에 대한 임상적 근거를 입증한 임브루비카와 같은 BTK 억제제의 급여 확대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인구 고령화로 고령층에서 주로 발병하는 만성 림프구성 백혈병 환자가 지속적으로 늘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나라도 국제 가이드라인에서도 권고하는 BTK 억제제를 1차 치료에 활용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정리= 권선미 기자 kwon.sunmi@joongang.co.kr

※ 진료받을 때 묻지 못했던 궁금한 점이 있으면 메일(kwon.sunmi@joongang.co.kr)로 보내주세요. 주제로 채택해 '닥터스 픽'에서 다루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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