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력한가요? 소소한 ‘자기 루틴’ 지키며 성공 경험 쌓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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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한창수 고려대구로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장기화하면서 정신건강의학과를 찾는 환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국민건강보험 데이터에 따르면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중 우울증 등으로 진료를 받은 인원은 이전의 같은 기간보다 30% 이상 증가했다. 미국의 성인 우울증 유병률은 세 배나 늘었다는 보고도 있다. 바야흐로 ‘코로나 블루’ 시대다.

우울증은 천의 얼굴을 가졌다. 우울하지 않아도 우울증일 수 있다. 잠을 못 자거나 반대로 너무 많이 잘 때, 식욕이 줄고 강한 향기나 냄새에 반응하지 않는 것도 알고 보면 우울증의 신호다. 최근 『무기력이 무기력해지도록』(RHK)을 출간한 고려대구로병원 정신건강의학과 한창수(53) 교수는 피로와 의욕 저하가 동반된 ‘무기력’에 주목한다. 힘이 없고(신체적 무기력), 의욕이 없고(감정적 무기력), 희망이 없는(사고의 무기력) 상태가 우울증의 발생 위험을 알리는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시대, 당연한 듯 여겼던 무기력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처해야 할까. 지난달 말 고려대의료원에서 한창수 교수를 만나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들었다. 박정렬 기자 park.jungryul@joongang.co.kr
 

고려대구로병원 정신건강의학과 한창수 교수

-무기력을 주제로 책을 발간한 이유가 궁금하다.

“코로나19가 창궐한 이후로 특히 청소년이나 청년층에서 무기력을 호소하는 사람이 많이 늘었다. 우울증, 공황장애까진 아니어도 “피곤하다” “의욕이 없다”며 상담을 하러 오는 경우가 꽤 된다. 이유를 고민하며 환자와 대화하고, 연구 논문을 읽다 보니 의학적으로 무기력이 정신질환을 대변하는 지표일 수 있더라. 무기력하다고 모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경우에 따라 점차 악화하다 치료가 필요한 상태로 접어드는 케이스가 적지 않았다.

고혈압도 고혈압 전 단계부터 관리해야 하듯 정신질환도 사전 예방이 중요하다. 무기력을 방치하다 우울·분노에 깊이 빠지게 되면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것은 물론 부정적인 감정의 책임을 타인이나 정부 등에 돌리는 ‘투사’로 변해 사회 전반의 갈등과 혼란이 심해질 수 있다. 중세 유럽에서 흑사병이 마녀사냥을 촉발했던 것처럼 말이다. 과거에는 무기력을 스스로 견디고 극복해야 했다면 이제는 정신건강의학과나 심리상담소를 통해 전문적이고 적극적인 대처가 가능해지지 않았나. 그렇다면 어떤 무기력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알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코로나19와 무기력의 관계는.
“코로나19 시대의 키워드는 단절이다. 사람들이 모이면 나를 괴롭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를 좋아하고 지지해주는 사람도 있다. 분위기 때문에라도 내가 무기력한지 모르고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코로나19가 유행하면서 사적 모임이 제한되고 필요한 내용, 알리고 싶은 내용만 전달하는 게 일반화됐다. 대인관계로 얻을 수 있는 긍정적인 효과가 축소된 것이다. 반면에 가정과 직장에서는 숨 쉴 시간이 줄었다. 아이는 집에 갇혀 힘들고 남편과 아내는 모두 육아와 가사 참여가 늘었다며 불만을 토로한다. 온라인 중심으로 업무 환경이 재편되면서 적당히 피했던 일에 꼼짝없이 매이는 경우도 허다하다. 몸과 마음이 지치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무기력도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날 수 있나.
“그렇다. 누구는 몸이 지치고 누구는 감정이 메마르거나 의욕 저하를 보이는 식이다. 책에서도 무기력을 크게 신체적 무기력, 감정적 무기력, 사고의 무기력으로 구분했다.”

-신체적 무기력의 원인은 뭔가.

“신체적 무기력은 과로로 인한 번아웃이 주요 원인이다. 휴식이 필요하지만 쉬더라도 잘 쉬지 못해 무기력해지는 사람도 많다. 단순히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게 휴식이 아니다. 진정한 휴식이란 삶의 다음 과정을 위해 내 몸을 정비하는 시간이다. 군대에서 행군할 때 중간에 쉬면서 음식도 먹고 양말도 갈아 신지 않나. 개인 정비라고 하는데 휴식도 이런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그 중 한 가지 조건이 있다면 자신이 하는 일과는 다른 방식으로 실천하라는 것이다. 평소에 몸을 많이 쓰는 사람이라면 전시회를 가서 작품을 보거나 음악을 듣고, 컴퓨터 작업이 많은 사람은 스마트폰이나 TV를 보는 대신 걷거나 조깅하는 식이다.”

-일이 많아 못 쉬는 사람도 있다.

“해야 할 일을 하는 게 아니라 할 수 있는 만큼의 일을 하는 게 맞다. 일이 너무 많으면 다른 사람과 분배하거나 상급자에게 업무 범위를 재지정해 달라고 요청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요청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상급자도 일을 120% 시켜야 100%를 해낼 것이란 생각에 과도하게 업무를 시킬 때가 많다.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120%를 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체력적인 한계에 부딪히고 신체적 무기력 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업무량을 줄이는 게 어렵다면 업무 시간이라도 조정하자. 오늘 다 해야 한다고 여기지만 실상 그렇지 않은 일도 많다.”

-감정적 무기력은 생소한 개념이다.

“감정 반응을 하지 못하고 스트레스에 압도되는 상태를 감정적 무기력이라고 본다. 감정은 어떤 식으로든 폭발하는데, 그 방향이 내부를 향하면 사회와의 단절, 우울증이나 자살로 이어지고 외부를 향하면 분노조절 장애나 묻지마 폭행 등으로 나타난다. 신체적 무기력보다 감정적 무기력이 가정이나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킬 위험이 크다. 주로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 감정적 무기력에 잘 빠진다.”

-감정적 무기력을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자존감을 높여야 한다. 진료실에서 스스로 자존감이 없는 이유에 대해 “어린 시절에 사랑을 못 받아서” “집이 가난해서”라고 설명하는 환자를 만나곤 한다. 이런 반응은 현재의 자신을 과거의 자신에게 책임 전가하는 일종의 자기연민일 뿐이다. 오늘의 나를 책임지는 주체는 여기, 지금의 나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특히, 목표를 너무 높게 잡는 사람이 자기연민에 빠지기 쉽다. 안 되는 이유를 찾게 되기 때문이다. 당장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정하고 그걸 성공해내면 자기연민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한 교수가 최근 출간한 책 '무기력이 무기력해지도록'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준다면.

“감정적 무기력이 심하면 목표를 세우기도 어렵다. 사실 감정적 무기력은 시간이 가야 회복된다. 이런 상태에 추천하는 방법이 ‘자기 루틴을 만들자’는 것이다. “알람이 울리면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 감고, 옷을 입자” 이렇게 마음을 먹고 자각하며 실천하는 것이 자기 루틴을 만드는 것이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해내면서 성취감을 느끼면 무기력에서 더 빨리 벗어날 수 있고 직업적·학업적으로 부정적인 영향도 최소화할 수 있다.”

-자기연민이 과거에 기인한 것이라면 그것과 결별 혹은 단절하는 의식이 필요하지는 않나. 

“과거와 현재는 떼려야 뗄 수 없다. 과거에서 벗어나기보다 이해하도록 노력하는 게 어떨까. '살아가는 것은 용기를 내는 일'이라는 말이 있다. 용기 있는 삶이란 앞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건 힘들어도 하겠다는 결심, 내 인생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건 안 하겠다는 결심이다. 지금 당장 마음을 먹자. 바꿀 수 없는 과거는 받아들이고 변할 수 있는 현재와 미래에 집중하자.”

-사고의 무기력이란.

“사고의 무기력은 기본적으로 비관적인 사고다. 내 인생은 이럴 수밖에 없다. ‘노력해도 하지 못 해’라고 생각하는 게 사고의 무기력이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는 것이다. 미래를 계획하려면 본인이 이를 생각(사고)해야 하는데 사고의 무기력에 빠지면 그게 안 된다.”

-비관적인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은.

“주변에서 뭔가 해줄 것이라 기대하지 말라. ‘밴드웨건 효과(편승 효과)’라는 게 있다. 잘되는 것에 손뼉 치고 따라가는 현상을 말한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타인을 동정해도 스스로 움직이고 이기려는 사람을 도와주지 자기연민에 빠져 “나는 불쌍해” “나는 힘드니 주변에서 나를 챙겨줘야 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은 드물다. 반복된 실패 경험과 우울한 사회 분위기에 짓눌리지 말고 자기 루틴을 정해 성공의 경험을 축적하길 바란다. 미래의 내가 과거로 바라보는 때가 바로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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