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빈혈 환자 상당수가 가벼운 빈혈 증상을 방치한다는 것이다. ‘좀 쉬면 낫겠지’ 하고 여겨 치료 시기를 놓치기도 한다. 고대구로병원 혈액내과 김대식 교수는 “빈혈은 그 자체로도 치료 대상이지만 증상의 경중과 관계없이 또 다른 질환을 알리는 ‘빙산의 일각’일 수 있다”며 “빈혈의 출발점이 의외의 질환인 경우가 많다”고 강조했다. 이 때문에 빈혈은 증상이 아무리 가벼워도 방치해선 안 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빈혈은 혈액 속 적혈구량이 부족할 때 진단한다. 김대식 교수는 “적혈구는 우리 몸 구석구석으로 산소와 영양분을 운반한다”며 “적혈구가 부족하면 산소·영양분이 말초 조직까지 공급되지 못해 어지럼증이나 피로감을 유발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노인 위암·대장암, 만성질환 전조 증상
빈혈을 동반하는 원인 질환은 나이대에 따라 다르다. 박 교수는 “특히 60세 이후 노인과 20~40대의 청장년층에서 빈혈을 동반하는 원인 질환은 차이를 보인다”며 “건강한 줄 알았는데 빈혈을 진단받았다면 그 나이대의 다빈도 질환이 빈혈의 원인일 수 있다”고 경고했다.
노인의 빈혈은 치명적인 질환을 암시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서울대병원 가정의학과 박민선 교수, 삼육서울병원 전 가정의학과 권영민 과장이 60세 이상 1만114명을 대상으로 가벼운 빈혈과 사망 위험의 상관성을 7년 이상 추적 관찰했다. 그 결과 가벼운 빈혈이 있는 남성 노인은 빈혈이 없는 남성 노인보다 암 때문에 사망할 위험이 2.3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노인 빈혈이 암시하는 중증 질환은 위암·대장암이 대표적이다. 한림대 성심병원 혈액종양내과 김호영 교수는 “위암·대장암 등 위장관에 생기는 암은 점막에 궤양성 병변을 만들고 출혈을 유발해 빈혈을 야기한다”고 설명했다. 빈혈 진단 후 추가 혈액검사에서 철분 결핍이 확인되면 의사의 판단으로 위·대장 내시경 검사를 진행한다.
고혈압, 당뇨병, 염증성 질환 등 만성질환도 노인 빈혈의 주요 원인 질환이다. 박 교수는 “만성질환이 있는 사람은 사이토카인(면역·항상성 조절물질) 기능에 문제가 생겨 철분 같은 조혈(造血) 영양소의 흡수·운반에 장애를 일으키고 결국 빈혈을 유발한다”고 말했다. 이 경우 체내 저장된 철분이 충분해도 최종 생성되는 적혈구의 양이 적어 빈혈을 야기한다. 만성질환자 가운데 어지럼증 같은 빈혈 증상이 있다면 혈액검사를 받는 게 좋다.
조혈기관 장애도 노인 빈혈을 부른다. 적혈구를 만들지 못하는 재생불량성 빈혈과 골수이형성증후군, 백혈구의 과도한 증식으로 적혈구 생산을 저해하는 백혈병 등이 대표적이다. 빈혈이지만 혈액 속 철분이 충분히 있다면 조혈기관 장애 여부를 추가로 검사받는다.
20~40대 청장년의 빈혈은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다. 지난해 빈혈로 진료받은 20~40대 환자 가운데 여성은 51만623명으로, 같은 연령대 남성(4만976명)의 12.4배에 달했다. 김호영 교수는 “이 시기의 여성은 생리와 임신· 출산 등 가임력과 무리한 다이어트가 빈혈과 관련 깊다”고 강조했다. 생리혈 양이 부쩍 많아졌다면 빈혈이 생길 수 있다. 이 경우 자궁근종·자궁내막증이 원인일 수 있어 산부인과 검진이 권장된다.
청장년 여성 자궁, 남성 항문 질환 암시
임신부는 빈혈 예방에 특히 신경 써야 한다. 태아가 혈액을 만들기 위해 모체의 철분을 가져가기 때문이다. 임신부에게 철분이 부족하면 태아 발달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고, 생후 2~3개월에 유아 빈혈을 유발할 수 있다. 출산 시 출혈로 인해 빈혈이 일시적으로 나타날 수 있지만 대부분 출산 1~2개월 내 사라진다.
편식이 심하거나 무리한 다이어트를 장기간 시도하면 철분, 비타민B12, 엽산 같은 조혈 영양소가 부족해 영양성 빈혈을 야기할 수 있다. 고른 영양 섭취가 필요하다.
이 연령대에서 남성 환자의 발생 빈도는 낮지만 빈혈이 있다면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흔한 원인은 치질이다. 배변 때마다 치루핵·직장에서 출혈을 반복하면 철 결핍성 빈혈을 야기할 수 있다. 위궤양, 위축성 위염도 주요 원인이다. 병변에서 출혈이 지속해 빈혈로 이어질 수 있다. 빈혈 환자 중 변비와 설사를 반복하거나 대변이 검다면(흑변) 위장관 출혈을 일으키는 위암·대장암일 수 있다. 소화 장애가 있으면서 빈혈로 진단받았다면 소화기 검진을 받을 필요가 있다. 백혈병 같은 혈액암, 재생불량성 빈혈 같은 조혈기관 장애도 이들 나이대에서 빈혈의 원인으로 꼽힌다.
어지럽다고 철분제 복용 NO, 어지럽지 않아도 빈혈 가능성 YES
-빈혈에 대한 오해와 진실
-빈혈에 대한 오해와 진실
“어지러워 빈혈 같은데 철분제 좀 주세요.” 약국에서 환자가 흔히 범하는 실수로 꼽힌다. 어지럼증을 느낄 때 빈혈이라고 자가 진단해도 괜찮을까. 어지럼증이 없으면 빈혈이 아닌 걸까. 빈혈에 대한 대표적인 궁금증을 풀어본다.
빈혈은 혈액량이 부족한 것이다? (X)
성인의 혈액량은 약 5~6L다. 빈혈은 혈액의 절대적인 양이 부족한 게 아니라 혈액 속 적혈구 수가 정상보다 적은 상태를 말한다. 혈액은 백혈구·적혈구·혈소판 같은 혈구 세포와 혈장(물 성분)으로 이뤄져 있다. 그중 상대적으로 적혈구량이 적은 것이 빈혈이다.
어지럼증이 나타나면 대부분 빈혈이다? (X)
빈혈은 어지럼증 원인 질환의 30%에 불과하다. 이를 제외한 어지럼증의 30%는 평형감각을 담당하는 전정기관의 이상, 30%는 부정맥 같은 순환기계 질환, 10%는 중추신경계 이상이 원인이다. 어지러울 때 빈혈로 착각해 철분제를 임의로 사 먹는 경우가 많다. 철분 결핍성 빈혈이 아닌데 철분을 과잉 섭취할 경우 오심·소화장애·속쓰림·변비 등 위장관 내 부작용을 유발할 수 있다.
빈혈 증상은 어지럼증에서 시작한다? (X)
빈혈의 대표 증상이 어지럼증이지만, 별다른 이상 증상을 못 느낄 수도 있다. 빈혈이 오랜 시간 조금씩 진행된 경우 몸이 빈혈 상황에 적응해서다. 빈혈의 또 다른 증상으로 피부, 입술 양 끝이 창백해지거나 손바닥의 손금 색이 옅어질 수 있다. 손톱이 쉽게 부서진다. 걷거나 물건을 들 때 예전보다 숨이 차기도 한다. 철분 결핍이 심하면 얼음이나 생쌀을 씹어 먹고 싶은 욕구가 강해진다.
편식으로 생기는 빈혈은 철분이 부족해서다? (△)
피를 만드는 영양소는 철분뿐 아니라 비타민B12와 엽산 등이 있다. 철분은 적혈구에서 헤모글로빈과 단단히 결합해 산소·영양분을 나르는 ‘그릇’이 된다. 비타민B12와 엽산은 적혈구와 백혈구의 재료가 된다. 이들 영양소는 골수에서 적혈구를 만들 때 재료로 쓰인다. 한 번 생성된 적혈구는 비장에서 파괴되기까지 120일 정도 체내를 순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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