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이야기]몸의 보호 장치가 오히려 '독'이 되는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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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몸속 방패, 혈액뇌장벽(Blood-Brain Barrier)

일러스트 최승희 choi.seunghee@joongang.co.kr

“모든 약은 독이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죠. 중세시대 약리학자 파라셀수스가 "독성이 없는 약은 없다"는 의미로 한 말입니다. 실제로 '약'은 몸에서 '독'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그 독성의 결과는 우리가 알고 있는 부작용이라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극과 극은 통해서일까요. 조금 다른 의미로 신체에서도 이런 결과가 발생합니다. 몸을 지키기 위한 장치가 오히려 몸을 해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자가면역질환'이죠. 면역체계에 이상이 생겨 바이러스 등 몸에 해로운 침입자를 제거하는 데 그치지 않고 몸의 정상세포까지 공격합니다. 이와 좀 다른 성격의 장치도 있습니다. 이번 약 이야기에서는 몸을 지키기 위한 방패가 오히려 결과적으로 나를 찌르는, 정확히 말하면 적까지 지키는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바로 몸속 '장벽'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 몸에는 몇 개의 장벽이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혈액뇌장벽(Blood-Brain Barrier)'입니다. 약자로 'BBB'라고도 합니다. 이름에서도 유치할 수 있듯이, BBB는 한마디로 혈액과 뇌 사이를 차단하는 장벽입니다.
혈액은 온몸에 흐르죠. 특히 뇌는 산소와 영양분을 가장 많이 필요로 하는 기관입니다. 몸에서 에너지를 가장 많이 소비하는 곳이기도 하죠. 따라서 몸을 순환하는 혈액의 5분의 1은 곧바로 뇌로 간다고 합니다. 근데 뇌에는 아교세포라는 세포가 혈관을 단단히 둘러싸고 있어 혈액을 통제합니다. 혈액에 있는 모든 세포가 통과하지 않도록 하는데요, 즉 혈액 내 물질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뇌는 아시다시피 우리 몸에서 아주 중요한 기관입니다. 뇌는 가장 많은 혈액과 에너지를 필요로하는 데다, 우리 몸에 뻗어나가는 신경을 통제하는 곳이기도 하죠. 몸의 사령탑 같은 곳입니다. 이곳이 손상되면 당연히 심각한 결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위험한 물질로 보이는 것은 아예 뇌로 진입하는 것을 차단하는 것입니다. 일종의 관문인 셈이죠. 물리적인 힘은 두터운 두개골로 보호한다면, 화학적인 작용은 BBB라는 장벽을 통해 보호하는 것입니다.
 

인류가 이런 사실을 알아내는 것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1908년에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은 세계적인 세균학자 파울 에를리히가 개발한 '트립토판 블루'라는 염색약이 있습니다. 이 염색약은 죽은 세포만 파랗게 염색하는 성질이 있습니다. 근데 동물 혈관에 이 염색약을 주사하니 뇌와 척수만 염색이 되지 않더라는 겁니다. 당시에는 뇌와 척수의 조직이 뭔가 성질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제자는 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조직과 마찬가지로 뇌와 척수도 파랗게 염색이 되는 것을 확인하게 되죠. 아예 염색이 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염색약을 차단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의심을 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BBB라는 존재가 혈액 안에 있는 성분 중 염색약처럼 뇌나 척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성분을 통과시키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됩니다.
 
즉, BBB는 면역세포처럼 우리 몸을 지키는 방어체계입니다. 근데 문제가 있었죠. BBB가 우리 맘처럼 작동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투여한 약의 성분까지 걸러내는 겁니다. 그렇다고 몸에 해가 되는 성분을 모두 차단하는 것도 아닙니다. 헤로인, 코카인 같은 마약이나 알코올, 니코틴 등 중독 매개물질은 BBB를 통과합니다. 뇌염과 광견병의 바이러스도 BBB를 통과해 질병을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BBB는 실제 의학연구의 장벽이기도 했는데요. 특히 뇌 종양 치료 연구의 걸림돌이었습니다. 약물이 뇌로 전달되지 못하니 뇌에 생긴 종양을 치료하는 약물을 개발하는 데 큰 난관이었죠. 가령 약물을 1000을 투여했다면 뇌에 도달하는 양이 채 1도 안 된다고 합니다.
 

장벽 뚫는 기술 속속 개발…뇌종양·치매 치료 전망 밝혀
치매 치료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최근에는 BBB가 치매의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합니다. 기존에는 베타아밀로이드 단백질이 뇌 신경세포를 손상시켜 치매가 발생하는 것이 정설이었습니다. 근데 나이가 들면서 BBB가 약해져 혈관 속에 있는 독성물질이 뇌로 들어가서 치매가 생긴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합니다.
 
따라서 BBB에 대한 연구는 최근 활발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결실도 얻었지요. BBB를 통과시키는 여러 방식이 선을 보이고 있습니다. 광견병 바이러스가 BBB를 통과할 수 있는 것은 이 바이러스에 있는 'RVG 단백질' 때문이라는 사실이 연구진에 의해 밝혀졌습니다. 또 특정 수용체에 결합하도록 한 뒤 세포가 단백질 같은 물질을 세포막을 이용해 삼키는 내포작용을 이용하는 이중항체(bispecific antibody, BsAb) 플랫폼기술도 선보였습니다. 식후 혈당변화에 영향을 받는 BBB의 특성을 이용해 BBB를 통과하는 나노 머신도 개발됐습니다. 이 나노 머신에 약물을 탑재한 뒤 식전에 주입하고 식사를 해서 식후 혈당 변화에 따라 BBB 통과 후 약물 전달률을 높이는 방식입니다.
 

실제로 이런 기술을 이용한 약물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오시머티닙'이라는 성분의 표적항암제가 대표적입니다. 폐암치료제인데요, 뇌로 전이된 폐암 환자의 치료효과가 발표된 겁니다. 폐에는 혈관이 다른 장기보다 많아서 암이 전이될 확률이 높고, 뇌나 뇌수막으로 전이되기도 하죠. 특히 뇌수막으로 전이되면 예후가 아주 안 좋습니다. 특정 변이(EGFR)가 있는 폐암 환자 중 15%에 뇌 전이가 있고, 치료 중에는 이 수치가 40%를 넘어섭니다.  그 동안은 뇌로 전이된 폐암을 치료하는 것이 어려웠는데, 이 약이 개발되면서 치료의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전문가들은 향후 이 약이 1차 치료제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하네요.
 
항암제뿐만 아니라 치매 치료제 개발도 가속도가 붙을 전망입니다.
 

BBB와 비슷한 장벽이 체내에 또 있긴 합니다. 우선 '혈안장벽(Blood-Ocular Barrier)'이 있습니다. 혈액으로부터 눈을 보호하는 장벽이라고 할 수 있죠. BBB와 비슷합니다. 혈안장벽도 눈의 기능을 유지하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망막이나 홍채 등의 암에 대한 항암치료에는 장애가 된다는 점입니다. 성인에게 많이 생기는 포도막에 생기는 악성 흑색종은 항암치료가 잘 안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망률도 높다고 합니다. 하지만 BBB에 비해 이뤄지는 연구가 많지는 않다고 합니다.
'혈액고환장벽(Blood-Testis Barrier)'도 있습니다. 생식세포를 보호하는 장벽이라고 해야겠네요. 장벽이 있는 곳은 신체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라고 보면 될 듯합니다. 혈액고환장벽도 BBB처럼 감염으로부터 고환을 보호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BBB를 포함해 신체 내 장벽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뤄져서 심각한 장애나 질환으로부터 보다 자유로워지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봅니다.
 
※ 약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으면 메일로 보내주세요. 주제로 채택해 '약 이야기'에서 다루겠습니다.(j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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