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천성 심장질환자 생명의 길 밝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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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 탐방 세브란스 심장혈관병원 엄재선 교수

같은 질환이라도 누가 앓느냐에 따라 치료 난도가 달라진다. ‘부정맥’이 그렇다. 선천성 심장질환자에게 생겼다면 완전히 다른 얘기가 된다. 약을 써도 잘 듣지 않는다. 시술도 쉽지 않다. 심장 구조가 일반인과 다르고 장애 요소가 많아서다. 그만큼 이 분야의 전문가가 드물다. 이 험난한 길을 묵묵히 걷고 있는 의사가 있다. 세브란스 심장혈관병원 엄재선 교수다. 그는 선천성 심장질환자의 부정맥 시술을 한 단계 끌어올린 연구자로 평가받는다. 
 

세브란스 심장혈관병 원 엄재선 교수가 ‘3차 원 부정맥 지도화 시스 템’을 활용해 부정맥이 생긴 선천성 심장질환 자에게 중재시술을 하 고 있다. 김동하 기자

찾기 어려운 부정맥 위치
‘3차원 지도’ 만들어 파악
정확히 치료하는 법 연구
 
부정맥은 심장근육을 수축·이완시키는 전기 자극에 이상이 생긴 상태다. 규칙적으로 뛰어야 하는 심장이 불규칙하게 뛴다. 심장 기능이 떨어져 호흡곤란·실신, 심하면 심장마비로 이어진다. 선천성 심장질환자는 부정맥 발생 위험이 일반인의 10배에 달하고 치료도 어렵다. 이유는 다양하다. 약물치료가 힘들다. 부정맥에 쓰이는 약은 심장박동을 낮춰주는데, 선천성 심장질환자는 심장 기능이 떨어진 상태라서 부정맥이 없는 평소 맥박까지 떨어진다.
   
부정맥 발생 위험 일반인의 10배
 
또 다른 이유는 심장 구조와 부정맥의 기전이 일반인과 다르기 때문이다. 시술이 성공하려면 우선 부정맥 발생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관건이다. 하지만 선천성 심장질환자는 부정맥 발생 위치와 유형이 전형적이지 않아 전통적인 방법으론 찾기 힘들다.
  
그래서 엄 교수는 ‘3차원 부정맥 지도화 시스템’을 활용한다. 먼저 3차원 컴퓨터단층촬영(CT)으로 얻은 심장 영상을 분석한 뒤, 특수 카테터를 다리 혈관(하대정맥)을 통해 심장 내부까지 진입해 일일이 부정맥 발생 가능 위치에 대가며 전기신호를 탐지한다. 카테터로 받은 전기신호는 모니터의 3차원 심장 영상에 색깔별로 구현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전기신호를 가시화하는 시스템이다.  
  
간단한 작업은 아니다. 3차원 지도를 정확히 그리는 것 자체가 난제다. 카테터가 탐지한 신호 중 ‘노이즈’와 ‘부정맥 신호’를 분별해야 한다. 철저히 집도의 감각에 달린 영역이다. 치료 시에도 한번에 부정맥이 사라지지 않으면 광범위하게 고주파 에너지를 방출할지, 지도가 잘못돼 다시 그려야 할지 판단해야 한다. 엄 교수는 “노이즈를 신호로 잘못 인식하면 치료가 엉뚱한 곳에서 이뤄지게 된다”고 말했다. 한순간의 판단이 전체 결과를 좌우하는 셈이다.
  
위치를 정확히 잡아낸다고 끝이 아니다. 이젠 부정맥 발생 위치까지 도달해 부정맥을 잡는 과정이 남는다. 선천성 심장질환자는 심장 구조가 일반인과 다르고 심장 질환에 따른 수술로 인해 그 구조가 더욱 변형된 상태다. 심장의 이런 해부학적 구조를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면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
  
폰탄(Fontan) 수술을 받은 환자가 대표적이다. 다리에서 올라오는 대정맥(하대정맥)을 폐동맥으로 연결해 선천적으로 우심방·우심실을 연결하는 판막이 없어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수술이다. 이 수술을 받은 환자에게 부정맥이 발생하면 3차원 지도 자체를 그리기 어렵다. 카테터를 넣으면 하대정맥을 타고 우심방으로 진입해 전기신호를 탐지해야 하는데, 이 경우엔 하대정맥이 폐동맥과 연결돼 있어 카테터가 심장을 거치지 않고 폐로 간다. 엄 교수는 “폰탄 수술을 받은 경우엔 고어텍스로 혈관을 대체한 도관과 심장을 뚫고 진입해야 한다”며 “잘못 뚫고 나가면 아예 심장으로 들어가지 못하거나 장기의 다른 곳을 찔러 환자가 사망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3차원 부정맥 지도화 영상. 왼쪽 영상에선 부정맥 발생 부위(붉은색)를, 오른쪽 영상에선 심장의 부 위별 건강 상태를 파악할 수 있다.

 
부정맥 시술 단계 체계화
 
국내에서 선천성 심장질환자의 부정맥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의사는 손가락에 꼽는다. 치료 난도가 높기도 하지만 별도의 트레이닝 과정이 없는 것도 이유다. 보통 부정맥 시술은 심장내과에서 다루고 선천성 심장 질환은 소아심장과의 주 영역이다. 두 분야를 섭렵해야 하기 때문에 도전 자체가 쉽지 않다. 엄 교수는 소아심장 전문의인 아내의 영향이 컸다. 엄 교수는 “내가 전임의 과정에 있을 때 아내가 ‘선천성 심장 질환 수술을 받은 환자에게 부정맥이 생기면 해결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하더라”며 “전담하는 의사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진로로 삼게 됐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선천성 심장질환자 부정맥 치료 전문가의 길을 걸었고, 그 실력은 지금 해외에서도 인정받는다.
  
엄 교수는 심장 수술을 받은 부정맥 환자 치료 시 카테터 진입 방법을 체계화했다. 단단한 도관을 실패·실수 없이 뚫는 노하우를 담았다. 선천성 심장질환자의 부정맥 치료 난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 셈이다. 엄 교수는 폰탄·머스터드 수술 등 선천성 심장 수술을 받은 13명에 대한 부정맥 시술 경험을 바탕으로 카테터 심장 진입 방법을 단계별로 논문에서 제시했다. 이 논문은 유럽부정맥학회지에 실렸다.  
  
논문의 의미와 중요성은 금세 인정받았다. 미국부정맥학회가 이 논문을 접하고 부정맥을 전문으로 진료하는 의사 교육을 위한 글을 써줄 것을 엄 교수에게 의뢰한 것이다. 이 글은 미국부정맥학회지에 바로 게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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