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병원·국가 초연결 미래 의학 연구개발 새로운 롤모델 제시

[박정렬 기자] 입력 2021.09.06 08.57

고려대의료원 청담 고영캠퍼스 개소

1900년대 중반 미국과 소련은 앞다퉈 우주 개발에 뛰어들었다.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고 유인 우주선을 달에 보내기 위해 천문학적인 비용을 투자했다. 체제 선전을 위한 이들의 경쟁은 아이러니하게도 현대 과학기술 발전의 마중물이 됐다. 수많은 인공위성은 내비게이션·방송·통신 기술의 토대가 됐고 우주인의 생존을 담보한 전자레인지·진공청소기·정수기는 현대인의 필수 가전으로 자리 잡았다.
 

냉전이 오늘날 삶을 뒤바꿨듯,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은 ‘미래 의학’의 시간표를 앞당기고 있다. 유전자 검사, 신약 개발, 비대면 진료 등 변화의 폭과 깊이가 방대하다. 고려대의료원의 행보가 주목받는 이유다. 인공지능(AI)·빅데이터를 활용한 정밀의학과 기초·임상을 연결하는 기술 산업화, 홈 헬스케어까지 대학병원의 한계를 뛰어넘는 도전을 이어가며 미래 의학을 현실화하고 있다. 김영훈 고려대의료원장 겸 의무부총장은 “코로나19는 고려대의료원의 과거와 미래를 구분하는 변곡점이 될 것”이라며 “미래 의학 선도를 위해 2030년까지 약 1조원을 의료 분야 연구·기술 개발에 투자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2030년까지 총 1조원 R&D 투자  

고려대의료원은 산하 안암·구로·안산 등 3개 병원이 모두 상급종합병원으로 지정된 유일한 사학 의료기관이다. 매년 400여만 명의 외래·입원 환자를 돌보며 1조원이 넘는 의료 수익(매출)을 기록할 만큼 전국적인 명성을 쌓았다. 그런데도 고려대의료원은 수년 전부터 의료 규모가 아닌 ‘의료의 질’을 높이는 데 집중해 왔다. 진료 위주의 병원을 넘어 연구·교육을 아우르는 ‘KU Medicine’을 표방하며 미래 의학을 위한 인력·장비·공간 확충에 매진했다. 연구중심병원 연속 지정(안암·구로), 총 769억원이 투입되는 국가전략프로젝트 정밀의료사업단 선정은 이 과정에서 얻은 굵직한 성과들이다.
 

오는 10월 문을 여는 청담 고영캠퍼스에도 고려대의료원이 꿈꾸는 미래 의학의 청사진을 엿볼 수 있다. 강남 한복판에 들어서는 지하 5층, 지상 10층의 고영캠퍼스에는 진료실이 단 한 곳도 없다. 대신 한국형 홈 헬스케어 모델 개발을 위한 공동연구센터(3~5층)와 의료원장 직속 사회공헌사업본부(6층), 의료영상센터(7층), 임상연구지원본부(8층)를 설치해 미래 의학의 ‘전진기지’로 활용할 예정이다. 김 의료원장은 “고영캠퍼스는 고려대의료원이 미래 의학을 어떻게 바라보고 준비하는지 보여주는 ‘테스트베드’”라며 “집과 병원, 병원과 병원, 나라와 나라를 잇는 ‘초연결 의료’로 미래 의학의 롤모델을 제시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의료영상센터는 3개 병원의 의료 영상이 한데 모이는 ‘데이터 댐’이다. 대학병원에서는 하루에 수천 건의 영상 촬영이 이뤄진다. 병원의 의료진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워 외부에 판독을 의뢰하는 경우가 상당수다. 판독료로 매년 수십억의 비용이 쓰이지만 정작 결과를 완벽히 신뢰하지 못해 의료진이 이중확인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공간이 바로 의료영상센터다. 8명 이상의 영상의학과 전문의가 고난도 영상 판독을 책임지는 한편 AI를 활용한 영상 판독과 질병 예측 소프트웨어 개발에 주력할 예정이다. 김 의료원장은 “최근 국내 상급종합병원 최초로 클라우드 기반의 정밀의료 병원정보시스템(P-HIS)을 구축하면서 병원 간 원활한 의료 정보 공유가 가능해졌다”며 “영상의학과의 판독 부담을 덜어주면 혈관 스텐트 등 인터벤션 시술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 치료 성적도 한층 향상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병원급 가정 요양 프로그램 개발

가정과 병원을 연결하는 홈 헬스케어도 주목하는 분야다. 김 의료원장은 “초고령화 사회에서는 집에서 전문적인 케어를 받고 상태가 악화하면 연계된 병원에서 연속적으로 치료받는 ‘가정-병원 콤플렉스’가 활성화될 것”이라며 “방문 진료 수요가 높은 강남을 중심으로 의료진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원격 모니터링 시스템, 헬스케어 로봇 등 기술 개발에도 힘을 쏟을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 고영캠퍼스에서는 바야다코리아·아라케어 등 홈 헬스케어 전문기업과 함께 가정에서도 안심하고 황혼기를 보낼 수 있는 방안을 공동 연구할 예정이다. 예컨대 입원 환자의 간호 데이터를 토대로 낙상 예방에 최적화된 조명 밝기나 침대 기립 속도를 결정하는 식이다. 종전에 간호사·요양보호사 중심의 방문 진료도 신경과·재활의학과 등 대학병원 교수의 참여로 전문화·고도화시킬 계획이다.
 

2018년 고려대의료원은 의과대학 설립 90주년을 맞아 ‘미래 의학, 우리가 만들고 세계가 누린다’는 비전을 선포했다. 임상연구지원본부·사회공헌사업본부는 의료원의 ‘글로벌 DNA’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공간이다. 특히 임상연구지원본부는 세계 종합병원 가운데 최초로 ‘ISO14155’ 인증을 획득하며 해외 진출의 ‘러닝메이트’ 역할을 수행할 예정이다. 유럽 시장에 의료기기를 출시하려면 반드시 ‘ISO14155’ 규격에 맞춰 임상 데이터를 제출해야 하는데, 해외에 가지 않아도 고려대의료원에서 이를 진행할 수 있어 시간·비용적 부담이 크게 줄었다. 김 의료원장은 “타 대학과 병원, 연구원 등의 해외 진출도 적극적으로 도울 예정”이라며 “지속 가능한 사회공헌 활동을 펼치기 위해 국제·통일 보건의료 전문가도 체계적으로 육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청담 고영캠퍼스와 함께 10월 개소 예정인 정릉 메디사이언스파크에서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대비할 백신 연구가 진행된다. 최근에는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이 사재 100억원을 기부하며 원천기술 확보에 대한 기대감이 한층 커졌다. 김 의료원장은 “발생 시기와 변이 여부에 영향을 받지 않는 범용 인플루엔자 백신을 만드는 것이 목표”라며 “현재까지 발굴된 여러 후보물질의 기초·전임상 연구를 성공적으로 진행해 전 세계가 사용하는 저렴한 백신을 공급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저작권자 ⓒ 중앙일보헬스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