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분자 물질, 암세포 잡는 표적항암제 무사고 운반

[류장훈 기자] 입력 2016.12.19 10.04

신약 개발의 핵심 기술 약물전달시스템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약(藥)의 효과에 관한 얘기다. 아무리 획기적인 신약 물질이 있어도 현장에서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된다. 바로 ‘약물전달시스템(DDS·Drug Delivery System)’이다. 약물을 필요한 곳까지 잘 전달하고 적정 시간 머물도록 만드는 방법을 말한다. 효과적인 약물전달시스템이 없는 신약은 그림 속의 불로초처럼 무용지물에 불과하다. 약의 효능과 부작용을 결정짓는 약물전달시스템. 여기에 첨단 과학기술이 적용돼 신약 개발의 핵심 축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세포막 성분으로 만든 리포솜, 이중 막 사이에 약물 담아 수송 촉수·빛 활용해 전달 효과 높여

 

15세기 스위스 의·화학자 파라켈수스(Paracelsus)는 “모든 약은 곧 독(毒)”이라고 했다. ‘부작용이 없는 약은 없다’는 의미와 함께 약물전달시스템의 중요성을 뜻하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약은 체내에 들어가면 혈관으로 흡수된다. 약물의 혈중농도가 높아졌다가 시간이 지나면 체내 대사와 함께 줄어든다. 여기서 중요한 두 가지 혈중농도가 있는데, 독성 농도와 최소 약효 농도다. 약효가 나타나는 혈중농도 최대치를 넘어 일정 수준에 이르면 약이 독으로 작용하고, 반대로 최소 약효 농도 아래에선 효과가 없어진다. 투약 후 약물의 혈중농도를 원하는 시간에 끌어올려 약효를 발휘하도록 하되 독성 농도는 넘지 않고, 적정 시간 유지되도록 하는 게 약물 치료의 관건이다. 약물전달시스템은 약물 치료를 최적화하는 필수 요소다. 평소 무심코 먹는 알약 진통제, 시럽, 바르는 연고, 붙이는 패치가 저마다 다른 형태(제형)를 띠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약물 분해·방출 속도 조절

 

하나의 약물전달시스템이 개발되는 과정은 복잡하고 아슬아슬한 장애물 경기와 같다. 인체의 수많은 대사 과정에 의해 약물이 소실돼서도 안 되고, 몸속 장기를 손상시켜도 안 된다. 약물이 목표 지점에 고스란히 도달하려면 넘어야 할 산이 그만큼 많다. 새로운 약물의 개발은 그에 맞는 약물전달시스템을 요구한다.

 

인터페론 이후 면역치료제로 각광받고 있는 단백질 치료제가 좋은 예다. 단백질 치료제는 항암제를 포함해 질병 치료에 폭넓게 사용된다. 하지만 이 약은 일반약처럼 경구 투여할 경우 약효를 보이기도 전에 짧은 시간 안에 몸에서 사라져 버린다. 위의 산성 환경을 버티지 못하는 데다 위에 있는 단백질 분해효소가 단백질로 돼 있는 이 약물을 단숨에 분해해 버리기 때문이다. 더구나 위를 통과한다 해도 소장 벽을 통해 체내에 흡수되기에는 분자량이 크다는 문제가 있었다.

 

PEG 덧입힌 ‘스텔스 리포솜’

 

그래서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주사 형태로 약물전달시스템을 바꿨다. 단점은 여전히 있었다. 약물이 몸안에서 짧은 시간만 머무르기 때문에 환자가 반복적으로 주사를 맞아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그래서 고안된 것이 생분해성 고분자다. 단백질 치료제를 고분자 물질로 이뤄진 나노입자 안에 담았다. 고분자 물질이 몸안에서 천천히 분해되면서 약물은 서서히 방출되도록 하는 원리다. 고분자 물질로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분해 속도 역시 짧게는 1~2주, 길게는 1~2년까지 조절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고분자처럼 약물 수송체로 주로 사용되는 리포솜도 비슷한 경우다. 리포솜은 세포막 구성 성분인 인지질과 콜레스테롤로 만든 이중막의 구형체를 말한다. 약물은 막과 막 사이에 담는다. 생체 성분으로 돼 있어 독성이 작은 데다 구성 성분에 따라 크기와 막의 투과성을 조절할 수 있어 효과적인 약물전달시스템으로 꼽힌다. 다만 리포솜 자체는 고분자에 비해 혈액 안에서의 안정성이 낮아 목표 지점에 도달하기 전에 약물이 방출되거나 대식세포에 발각돼 공격을 받는다는 단점이 있었다.

 

리포솜은 여러 가지 연구를 통해 진화하기 시작했다. 대식세포의 인식을 피하고 혈액 안에서 버틸 수 있는 방법이 고안됐다. 일명 스텔스리포솜이다. 레이더망을 피해 가는 스텔스 기술이 접목된 것이다. 리포솜 표면에 고분자인 폴리에틸렌글리콜(PEG)이라는 물질을 덧입힘으로써 가능해졌다.

 

약물의 진화는 계속됐다. 리포솜에 ‘리간드(Ligand)’를 도입한 것이다. 리포솜 표면에 돋아난 일종의 촉수다. 리간드는 특정 세포 표면에 있는 수용체와 결합하는 부위를 말한다. 그런데 암세포나 암 신생혈관은 수용체를 과다 발현하는 특성이 있다. 즉 리간드를 붙임으로써 암세포를 표적으로 해 찾아갈 수 있는 약물 개발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예전의 항암제가 호흡곤란, 구토, 혈관 부종, 탈모 등의 심각한 부작용이 있었던 것도 정상 세포까지 손상시켰기 때문이다. 몸안에서 버티는 것조차 쉽지 않았던 리포솜은 고분자와 리간드라는 날개를 달고 표적항암제의 약물전달시스템으로 거듭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로써 리포솜은 약물전달시스템의 충분조건 중 하나인 ‘이상이 있는 조직이나 세포로만 약물을 전달하는 기능’을 충족하게 됐다.

 

리포솜은 국내 연구진에 의해 한 번 더 탈바꿈했다. 분당서울대병원과 차의과대학 연구진이 매사추세츠병원과 공동 개발한 초음파 영상 기반 약물전달시스템이다. 리포솜을 운반체로 하는 항암제와 초음파 조영제를 결합한 것이다. 이에 따라 초음파 영상을 보면서 암을 치료할 수 있는 전기가 마련됐다. 최근 이 연구를 진행한 분당서울대병원 이학종 교수는 “이 약물전달시스템은 항암제를 기존보다 적게 투여하면서도 치료 효과를 극대화하는 반면 부작용을 상당히 줄일 수 있는 기술”이라고 설명했다.

 

초음파 영상치료 전기 마련

 

약물전달시스템 개발은 난치성 질환, 그중 암 치료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21세기 들어 새롭게 각광받기 시작한 약물전달시스템 개발은 지금도 속도를 내고 있다. 올해는 빛을 이용해 항암제 생산 효율을 높이는 기술까지 선보였다.

 

KAIST 바이오 및 뇌공학과 최철희 교수 연구팀이 개발한 약물전달시스템을 보자. 원리는 이렇다. 최 교수는 약물 운반체로 엑소솜을 이용했다. 항암 단백질 치료제를 엑소솜에 담았다. 그리고 특정 단백질을 융합했다. CRY2단백질과 CIBN단백질이다. 단백질 약물에는 CRY2단백질을, 나노 입자인 엑소솜에는 CIBN단백질을 붙였다. 이들 단백질은 특정 파장의 빛에 반응한다. 푸른빛 계열의 450~490㎚ 파장의 빛을 쏘면 이들 단백질이 서로 달라붙는 성질이 있다. 즉 빛을 쏴 단백질 약물이 엑소솜에 자연스럽게 탑재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기존에는 정제된 단백질 약물을 엑소솜에 넣어주는 수동 방식이었다. 이 기술로 단백질을 정제할 필요도 없어졌고, 탑재 과정을 자동화해 생산 효율을 높였다.

 

최 교수는 “단백질 치료제 적재율이 1000배는 높아졌다”며 “앞으로도 약물의 안전성과 안정성을 높이는 획기적인 약물전달시스템이 개발될 것”이라고 밝혔다. 약물전달시스템은 기존 기술과 신기술의 융합을 통해 치료 효과를 극대화하는 미래를 예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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